남들 다 가는 길, 나만 멈춰 있는 것 같다면?

카테고리: 사회와 사람

모임에 다녀온 날, 왠지 나 혼자 뒤처진 것 같은 느낌 있으신가요?

그 마음이, 오늘 이야기의 출발점이에요.

요즘은 집, 학교, 회사, 취미까지 '다음 단계 정답'이 정해져 있는 것만 같거든요.

남들보다 한 단계 늦으면, 실제로는 잘 살고 있어도 실패한 것 같은 마음.

우리는 왜 남이 먼저 간 길을 ‘정답’처럼 여기게 됐는지, 그 비교가 언제 약이 되고 독이 되는지 살펴볼게요.

"다음 테크 뭐 타야 하나요?"

지난 2일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 블라인드에 이런 글이 올라왔어요.

"36세, 맞벌이 연봉 합산 2억원, 순자산 7억원. 경기 동탄에 사는데 다음 테크 뭐 타야 하나요?"

하루도 안 돼 댓글이 50여 개 달렸습니다.

"분당 구축으로 한 번 점프한 뒤 서울 마용성(마포·용산·성동)이 정석", "애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학군지로 가야 한다" 같은 답이었죠.

여기서 '테크'는 테크트리의 줄임말이에요.

원래는 전략 게임에서 어떤 건물을 먼저 짓고 어떤 기술을 다음에 익혀야 이기는지 순서대로 정리한 공략표를 의미하는데요, 요즘은 이 말이 인생 전체에 쓰이고 있어요.

학교와 학과, 직장, 사는 동네는 물론 취미까지 '다음 단계 정답'이 정해져 있다는 생각이죠. 그러니 남들 다 가는 길에서 한 발만 늦어도, 나만 멈춰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 쉽습니다.

한국인이 생각하는 다음 정답들

부동산 | 경기 외곽 → 분당·광교 → 마용성 → 강남 3구

교육 | 영어유치원·초등 수학 선행 → 대치동 학원가 → 과학고·자사고 → 의대·반도체 학과

직장 | 대기업·공기업 입사 → 3~5년 차에 연봉 올려 이직 → 성과급 많은 회사

서울 25개 자치구를 1급지부터 7급지까지 나눈 '급지표'가 상식처럼 통하고, 올해는 반도체 호황으로 '삼전닉스 이직 테크'를 묻는 글도 많습니다.

취미에서도 달리기를 시작하면 입문용 러닝화에서 카본 러닝화로, 다시 시계와 해외 마라톤으로 단계가 이어지죠.

우리가 하는 비교의 기준

성인 1000명에게 '사회적 지위와 성공을 결정하는 기준'을 세 개까지 고르게 했더니, 결과는 이랬어요.

소득 | 58.4

자산 | 57.4

직장·직업 | 50.9

학벌 | 28

사는 지역·아파트 | 25.8

source=2026년 9월 28일~10월 2일 조사(한국경제신문·피앰아이, 성인 1000명, 최대 3개 중복 응답)

눈에 띄는 건 1, 2위가 모두 경제적 조건이라는 점이에요.

게다가 SNS는 이런 비교를 하루에도 몇 번씩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예전에는 가족이나 친구, 회사 동료가 비교 대상이었다면 이제는 나이와 직업이 비슷한 수많은 사람의 직장, 집, 여행, 소비를 끊임없이 확인할 수 있죠.

SNS를 많이 쓸수록 나보다 형편이 나은 사람과 비교하는 경향이 강해지고, 이런 비교가 내 경제적 지위를 낮게 보는 것과 연결된다는 연구도 있어요.

미국 시카고대 심리학과 오이시 시게히로 석좌교수는 비교의 대상이 집과 차 같은 물질적 부로 옮겨 가면 영감 대신 질투를 낳는다고 진단했어요.

그리고 "더 비싼 동네로 옮겨도 그곳에서 또 다른 상향 비교가 시작된다"고 말했어요.

결국 늘 다음 단계가 있으니 끝이 없는 게임이 되는 거죠.

한국은 유독 왜 그럴까요?

오이시 교수는 "동질적이고 작은 나라에서 성취 욕구까지 높으면 모두가 따르는 공통의 기준이 생긴다"고 했습니다.

성균관대 구정우 교수는 "표준화된 삶의 방식은 과거 생존과 성장의 동력"이라고 했고요.

전문가들은 좁은 지역에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 살고, 압축성장 과정에서 성공의 기준이 좁아진 것이 이런 문화와 관련 있다고 설명합니다. 개인 입장에서는 남들이 이미 걸어본 길을 택하는 일이 실패 가능성을 낮추는 합리적 선택처럼 느껴질 수도 있고요.

문제는 모두가 같은 사다리를 오르기 시작할 때입니다. 좋은 자리는 한정돼 있으니 경쟁은 더 치열해지고, 사다리 밖의 선택은 ‘낙오’처럼 보이기 쉬워집니다.

오이시 교수는 일본도 1970~1980년대에는 지금의 한국과 비슷했지만, 경제가 정체되면서 많은 사람이 하나의 길을 좇는 일을 멈췄다고 했습니다.

반면 한국인은 "삼류에서 이류로, 또는 일류로 끊임없이 올라가려 한다는 점에서 존경스럽다"고 했어요.

저는 바로 이 점이 한국 사회의 장점이자 단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끝없이 올라가려는 힘이 우리를 여기까지 데려왔지만, 같은 힘이 우리를 쉬지 못하게 하니까요.

그렇다면 비교를 멈춰야 할까요? 오이시 교수의 답은 의외로 '아니요'였습니다.

여기까지, 오늘 레터를 조금만 읽으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