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된 자기소개서가 바뀌고 있습니다
40년 가까이 대기업 자기소개서의 첫 항목을 차지해 온 문항이 올해 하반기 공채에서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회사가 사람을 판단하는 방법이 어떻게 바뀌고 있는지 함께 확인해 보겠습니다.
"엄한 부모님 밑에서 자라 성실함과 책임감을 배웠습니다."
이 문장을 어디선가 읽어 보셨을 겁니다. 우리나라에 기업 공채 문화가 만들어진 뒤로 40년 넘게, 대기업 지원자들의 자기소개서 첫 항목을 차지해 온 유형이거든요.
성장 과정, 성격의 장단점, 지원 동기, 입사 후 포부. 순서까지 거의 정해져 있었습니다.
써 보신 분은 아실 거예요. 이 문항들은 사실 정답이 있는 문제에 가까웠습니다. 어려움을 겪었고, 그래서 배웠고, 그러니 저는 준비된 사람입니다. 이 구조만 지키면 내용은 무엇을 넣어도 됐거든요.
올해 하반기 공채에서 이 틀이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회사가 한꺼번에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름을 아는 큰 회사들에서 방향이 눈에 띄게 달라졌어요.
지금 신입사원 공채를 진행 중인 LG전자는 지난해 있던 '인생에서 직면했던 어려운 과제와 이를 극복한 경험을 기술하시오'를 없앴습니다.
대신 '데이터와 AI 같은 디지털 도구를 활용해 문제를 해결하거나, 새로운 방법으로 더 나은 결과를 만든 경험을 기술하시오'가 들어왔습니다. 앞의 문항이 마음을 물었다면 뒤의 문항은 결과물을 묻습니다.
'언제 가장 큰 보람과 행복을 느끼는가'를 묻던 현대카드도 방향을 틀었습니다. 올해는 '신기술과 새로운 프로세스로 문제를 해결해 기존 대비 어떤 차이를 만들었는가'를 묻습니다.
HD현대는 학업이나 일상에서 AI를 활용한 구체적 경험, 그리고 그것을 지원한 직무에 어떻게 적용할지를 함께 쓰라는 문항을 새로 만들었고요.
업종도 회사 성격도 다른데 질문의 방향이 같습니다. 무엇을 느꼈는지보다 무엇을 해봤는지, 그리고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지를 묻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크게 바꾼 곳은 SK하이닉스입니다.
지난해까지는 팀워크를 발휘한 경험, 도전 경험, 해시태그를 활용한 자기소개처럼 지원자의 인성과 성향을 알아보는 600자짜리 문항을 여럿 배치했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이걸 전부 없앴습니다. 대신 'AI를 활용한 프로젝트, 공모전, 논문, 연구, 문제 해결 경험을 작성하라'는 2000자짜리 실무형 문항 하나로 변경했어요.
총 다섯 개였던 문항이 두 개가 된 거죠.
여기서 포인트는 글자 수입니다.
600자는 한 가지 이야기를 예쁘게 다듬을 수 있는 분량인데요, 2000자는 무엇을 왜 했고, 어떤 도구를 어떻게 썼고, 결과가 어땠는지까지 쓰지 않으면 채워지지 않는 분량입니다.
취업 준비생들이 모인 온라인 공간에는 새 문항에 어떻게 답해야 하느냐는 물음이 올라오고 있어요. 지난해까지 준비한 답이 올해는 쓸 데가 없어졌으니까요.
SK하이닉스 | 팀워크 발휘 경험, 나의 가치관·개성·강점 | AI 활용한 프로젝트·공모전·논문이나 문제 해결 경험
LG전자 | 인생에서 직면했던 어려운 과제와 극복 경험 | 데이터·AI 등 활용해 문제 해결하거나 더 나은 결과를 만든 경험
포스코 | 회사 선택의 중요 가치, 직무 역량 갖추기 위한 노력 | 지원자의 관심·역량을 보여줄 수 있는 '증빙 가능한' 학내외 활동
source=왼쪽이 2025년, 오른쪽이 2026년 문항입니다. 각 회사가 공개한 공채 자기소개서 기준이고, 회사마다 문항 수와 글자 수는 다릅니다.
보수적이라고 하는 철강업계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포스코는 기본 자기소개서 항목을 아예 폐지하고 대신 학내외 활동을 포트폴리오처럼 요약해 쓰게 하면서 단서를 하나 달았습니다.
증빙(證憑)
증거로 삼을 수 있는 서류나 자료를 뜻하는 말이죠.
포스코는 '증빙 가능한 활동만 작성하라'고 했고, 수료증이나 연구 보고서, 데이터 결과물처럼 명확한 증거가 없으면 글 자체를 쓸 수 없도록 시스템을 바꿨습니다.
그렇다면 회사들은 더 이상 인성이 궁금하지 않은 걸까요?
인성을 보지 않는다기보다 자기소개서만으로는 인성을 판단하기 어려워졌습니다.
생성형 AI를 활용한 자기소개서 대필이 많아지면서, 그럴듯한 역경과 보람의 이야기가 단 몇 초면 만들어지는 시대가 됐으니까요.
평가 방법이 무력해졌다는 뜻이에요. 잘 쓴 글과 잘 쓴 것처럼 보이는 글이 구별되지 않으면, 그 문항은 더 이상 사람을 가려내지 못하죠.
그래서 회사들은 도구가 만들어 줄 수 없는 것을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수료증, 공모전 수상 실적, 연구 보고서, 실제로 돌아가는 결과물.
식당에서 환불받을 때를 떠올려 보시면 "제가 어제 여기서 분명히 밥을 먹었거든요"라고 아무리 정성껏 설명해도 안 됩니다. 영수증이 있어야 합니다.
회사들이 지금 요구하는 게 그 영수증인 거죠.
그리고 인성 평가는 서류에서 면접으로 옮기고 있습니다.
SK하이닉스는 문항 수를 줄이는 대신 기존 20~30분이던 면접을 반나절짜리 과제 수행형으로 대폭 늘렸습니다. 반나절 동안 같이 과제를 해보면 글로는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이니까요.
한 대기업 인사팀 관계자는 "실제 업무 환경과 유사한 과제에서 AI를 활용해 본인 역량을 증명할 수 있느냐가 취업의 핵심"이라고 했습니다.
어제 예누 레터에서 함께 본 500시간이 여기서 다시 나옵니다
어제 SK텔레콤 이야기를 함께 봤는데요, 50시간이면 되던 업무를 AI로 바꾸는 데 500시간이 넘게 들었고, 그 골짜기를 지나자 같은 업무가 1시간 만에 끝나게 됐다는 이야기였어요.
그 500시간에 무엇을 했는지도 함께 확인했습니다. 머릿속에만 있던 기준과 예외를 전부 밖으로 꺼내 적는 시간이었죠.
오늘 자기소개서 문항을 다시 읽어 보시면, 회사가 요구하는 것이 정확히 그 500시간의 결과물입니다.
'AI를 활용해 문제를 해결한 경험'이라는 건 도구를 켜 봤다는 뜻이 아니에요. 내가 하던 일을 기계에 설명할 수 있을 만큼 정리해 본 적이 있느냐를 묻는 겁니다.
SK텔레콤은 그 500시간을 회사가 부담했습니다. 급여를 주면서 골짜기를 건너게 해줬어요. 반면 올해 자기소개서는 그 골짜기를 입사 전에 건너와 있으라고 말하는 모양이 됩니다.
회사가 야박해서라기보다는, 이제 그 경험을 가진 사람과 안 가진 사람이 실제로 구별되기 때문일 겁니다. 다만 준비의 시점이 입사 후에서 입사 전으로 당겨졌다는 것은 분명해요.
그래도 다행인 점은 회사가 요구하는 증거가 꼭 거창한 것은 아니라는 거예요.
HD현대의 새 문항을 다시 보시면 '학업 또는 일상에서' AI를 활용한 경험을 쓰라고 되어 있습니다.
학교 과제도, 아르바이트하면서 낸 개선 제안도, 늘 반복하던 일을 자동으로 돌게 바꿔 본 경험도 전부 들어갑니다.
규모가 아니라 무엇을 바꾸려 했는지를 보여줄 수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예누의 생각
수료증도, 공모전 수상 실적도, 돌아가는 결과물도 지원서를 쓰는 달에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전에는 공채 시즌 두세 달 전부터 준비하면 됐다면, 이제는 지난 1년 동안 무엇을 했느냐가 그대로 서류가 됩니다.
반대로 보면 이건 미리 알수록 유리한 종류의 변화이기도 하지요. 오늘 이 소식을 읽은 것과 지원서를 열어 볼 때 처음 아는 것은 많은 차이가 나거든요.
그런데 이건 취업 준비생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영업하는 분에게는 제안서가 증거이고, 강의하는 분에게는 강의 영상이 증거입니다. 개발하는 분에게는 코드를 올려둔 곳이 증거이고, 가게를 하는 분에게는 손님 후기와 매출 기록이 증거예요.
전부 같은 이야기입니다. 이제는 "할 수 있습니다"보다 "해봤습니다"가 신뢰를 만듭니다.
올해 만든 것 중에서 링크나 파일로 지금 바로 열어 보여드릴 수 있는 것을 하나만 적어 보시겠어요?
적어 보면 내가 가진 게 이야기인지 증거인지가 드러나거든요. 증거는 만드는 시점에 같이 저장하지 않으면 나중에 못 만듭니다.